사과: 파리스의 사과
사과: 파리스의 사과
파리스의 판결, 파리스의 심판, 파리스의 사과 등으로 불립니다.
이야기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와 프티아의 왕 펠레우스(Peleus)의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테티스와 펠레우스가 결혼하게 된 과정에도 사연이 있지만, 여기서는 건너뜁니다.
결혼식은 펠리온 산에서 거행되었고, 이 자리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올림포스의 모든 신들이 초대받았습니다. 초대받지 못한 신은 바로 불화의 신 에리스(Eris)였죠. 결혼식날 불화를 초대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혼자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리스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지 못한 채로 결혼식에 나타났죠.
헨드릭 드 클레르크(Hendrik de Clerck)의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The Nuptials of Thetis and Peleus)은 이 장면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Hendrick de Clerck (1560/1570–1630), The Nuptials of Thetis and Peleus, 1606~1609, oil on copper, 54 x 76 cm, Musée du Louvre, Paris
화면 중앙에 마련된 잔칫상에 혼사의 주인공과 초대된 하객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가운데 보이는 자가 제우스일 것 같고, 그림에서는 오른쪽, 제우스 기준으로는 왼쪽에 있는 두 명이 혼사의 주인공일 것 같네요. 제우스 오른쪽 여신은 뒤에 에로스로 추정되는 아기천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프로디테일 것 같고, 그 옆에 있는 여신은 투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쟁의 여신 아테나일 것 같습니다.
그 위로 축가를 부르는 듯 보이는 무사이(Muses, Mousai) 여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우측 상단에 빨간 옷에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날아오는 여신이 있습니다. 내민 오른 손에 사과를 들고 있는 에리스이죠.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는 초대받지 못한 마녀 말레피센트가 공주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에리스는 그저 손에 들고 있던 황금 사과만 잔칫상에 던져 놓습니다
그 사과에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저주의 문장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한 문장이었죠. 하지만, 여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그 한 문장만으로도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여신들은 서로 자기가 그 사과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다투기 시작했죠. 다른 여신들은 곧 포기했지만, 우열을 가리지 못한 세 여신이 남게 됩니다.
제우스의 정실 부인이자 결혼생활의 수호신인 헤라(Hera),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 그리고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바로 그들이었죠.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는 세 여신들은 제우스에게 판결을 내려달라고 합니다. 세 여신 모두 뒷끝이 있음을 모를 리 없는 제우스는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판결을 내리지 않고, 세 여신에게 파리스를 찾아가 판결을 받으라고 합니다. 제우스가 뭔가 파리스 한테 꽁한게 있었을 겁니다. 그러지 않고 파리스에게 그 짐을 떠넘기지 않았겠죠.
이다산에서 양을 치고 있던 파리스(Paris)는 평범한 목동은 아니었습니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Priamos)와 헤카베의 아들인 그는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헤카베가 파리스를 임신하고 있을 때 꾼 꿈이 파리스 때문에 트로이가 멸망하게 할 거라는 해몽을 듣게 되고 이로인해 이다 산에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프리아모스는 가축을 돌보던 시종 아겔라오스(Agelaus)에게 아이를 이다 산에 버리도록 합니다. 아겔라오스는 시킨 대로 아이를 갖다 버린 후 5일 뒤에 가보죠. 하지만, 아이는 암곰의 젖을 먹고 건강하게 있었습니다. 이에 아겔라오스는 이 아이는 신이 보호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여 아이를 데려와 키우게 됩니다.
파리스는 마을 사람들을 도우며 보호해주는 남자라는 뜻의 알렉산드로스라고도 불릴 정도로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다산에서 성장한 파리스는 강의 신 케브렌의 딸인 아름다운 님페 오이노네(Oenone)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아들 코리토스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죠. (아폴로도로스 등에 따르면, 오이노네를 만난 게 왕자 신분을 찾고 나서라고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스가 죽었는 줄로만 알고 있던 프리아모스와 헤카베는 파리스의 제자를 지내려 신하들에게 이다산에 가서 황소를 잡아오게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신하들이 잡아간 소는 파리스가 가장 아끼는 소였습니다. 파리스는 황소를 되찾기 위해 궁으로 가고, 황소가 제례 때 열리는 기념 경기의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주어짐을 알고 경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누나인 카산드라(Cassandra)가 그를 알아보며, 왕자의 신분을 되찾게 되죠.
파리스는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인 오이노네와 함께 이다 산에서 양을 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불러 여신들을 데리고 파리스를 찾아가도록 합니다.
세 명의 여신은 헤르메스와 함께 이다 산에 도착하여 파리스를 찾아갑니다. 헤르메스는 황금 사과를 주며, 셋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그 사과를 주라고 합니다.
이 장면을 많은 화가들이 작품으로 남깁니다.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 The Judgment of Paris, c. 1528, oil on panel, 101.9 x 71.1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Manhattan, New York City, United States of America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가 1582년 경에 그린 그림에서는 파리스가 16세기 중세 기사의 갑옷 복장을 하고 있는 게 특이합니다. 무장한 헤르메스는 사과를 파르스에게 건내는데, 황금사과가 아니라, 사과인지도 알 수 없는 투명한 구체입니다.
세 여신은 모두 나체로 파리스 앞에 서 있는데, 평소 그들이 지니고 다니는 어떠한 상징물도 없어서 누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가운데에 모자를 쓴 여인이 에로스(Eros)로 보이는 아기천사 푸토(putto)를 가리키고 있어서 아프로디테일 것으로 추정해 보지만, 정확히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파리스의 복장 뿐만 아니라, 여신들의 머리 스타일도 16세기 스타일이라고 하네요.
세 여신은 모두 누드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서는 누드로 묘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에 보태진 이야기에 의하면 처음 갔을 때에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파리스가 판단을 못하지 여신들은 옷을 벗고 나신으로 비교하려 했다고도 합니다.
크라나흐는 이 외에도 파리스의 심판을 주제로 여러 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루벤스 역시 동일 주제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중 1632~1635년경에 그린 그림과 1638~1639년경에 그린 그림이 유명합니다.
앞서 크라나흐 작품에서는 세 여신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두 작품에서는 함께 등장하는 상징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Peter Paul Rubens (1577–1640), The Judgment of Paris, c. 1638-1639, oil on panel, 199 x 381 cm,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Spain
이 그림에서는 세 명 중 가장 왼쪽에는 하얀 천을 두르고 있는 여신이 있습니다. 그녀의 오른쪽 발 옆에 투구와 방패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로 보입니다. 그녀의 옆, 여신들 중 가운데에는 붉은 천을 걸치고 있는 여신이 있습니다.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붙들고 있는 꼬마천사는 화살통을 매고 있습니다. 천사 모습을 한 건은 에로스이고, 에로스와 함께 있는 여신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 보여집니다. 그림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신은 뒷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 어둡게 공작새가 보입니다. 헤라의 상징물이 공작, 뻐꾸기, 석류 등이니까 헤라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38년경 작품에서는 세 여신 앞에서 헤르메스는 황금사과를 들어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세 명의 경쟁심을 자극하려는 것 같습니다.
1636년경 작품에서는 황금사과를 들고 있는 게 파리스이니 굳이 시간 순서를 따지자면 1638년경 작품이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들고 있는게 아니라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넘기려는 장면입니다.

Peter Paul Rubens (1577–1640), The Judgment of Paris, c. 1632-1636, oil on oak wood, 144.8 x 193.7 cm, National Gallery, London
1636년경 그려진 그림에서는 가장 왼쪽의 여신 뒤로 메두사가 붙어있는 방패와 올빼미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쟁의 여신 아테나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세 명 중 오른쪽 여신 옆에는 공작새가 있어서 헤라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가운데가 아프로디테겠죠. 그 뒤에 옷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것은 에로스일 겁니다.
그러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아프로디테일까요? 이는 후대에도 여전히 논쟁거리였습니다. 세 여신 모두 실존인물이 아니니 논쟁자체가 의미가 없지만요.
아프로디테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아닐 수 있다는 사람들은 파리스는 여신들의 외모가 아니라 여신들이 약속한 선물때문에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판결 전 세 여신은 각자 파리스에게 자신을 승자로 뽑아주면 대가를 주겠다고 합니다.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아테나는 모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죠.
그 중에서 파리스는 이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한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줍니다. 아내 오이노네가 있었음에도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헬레네였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약속을 지켰지만, 이는 트로이 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Peter Paul Rubens (1577–1640), The Judgment of Paris, c. 1597-1600, oil on canvas, 144.8 x 193.7 cm, National Gallery, London
루벤스가 1600년경에 그린 그림을 보면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아프로디테에게 붉은 관을 씌워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마냥 축하하는 분위기는 아니죠. 천사가 있는 곳을 제외하면 먹구름으로 하늘이 어둡습니다.
그림 왼편의 헤라는 인정 못한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으며, 오른쪽의 아테나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으나 역시 인정하지 못하고 있겠죠.
그리고, 화면 오른쪽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다른 그림에는 안 보이던 남녀가 보입니다. 파리스의 아내 오이노네와 그녀의 아버지, 강의 신 케브렌입니다. 그들은 파리스가 왜 아프로디테를 선택했는지 알고 있는 듯 합니다.
결국 이는 파로스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